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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첫 서구 외교사절단, 보빙사(報聘使)의 역사적 의의와 영향

by 지역사람 2024. 12. 11.

보빙사는 1883년 조선에서 최초로 미국과 서방 세계에 파견된 외교 사절단입니다. 이 역사적인 사절단의 파견 배경, 구성원, 주요 활동, 그리고 그들의 여정이 조선의 근대화와 국제 관계에 미친 영향을 살펴봅니다. 보빙사의 이야기를 통해 19세기 말 조선의 외교 정책과 근대화 노력을 이해해 봅시다.

 

보빙상 위키백과

 

보빙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출발 전 보빙사. 뒷줄 왼쪽부터 현흥택(원문: 고영근), 최경석(원문: ThokChen), 유길준, 고영철, 변수.앞줄 왼쪽부터 홍영식, 민영익, 서광범, 로웰 미국 도착 후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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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빙사(報聘使)의 탄생 배경은 19세기 말 조선의 국제 정세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1883년 4월 미국의 푸트(Foote, L. H.) 공사가 조선에 부임하게 됩니다. 이에 대한 답례로, 고종은 미국에 사절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사절단이 바로 보빙사입니다.

 

보빙사라는 명칭은 '답례로 외국에 파견하는 사절단'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1883년에 미국에 파견된 특정 사절단을 지칭합니다. 이 사절단의 파견은 단순한 외교적 의례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종의 실질적인 목적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임오군란 이후 강화된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 조선의 자주독립국 지위를 미국으로부터 공인받고자 했습니다. 둘째, 조선 정부의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는 데 있어 미국의 협력을 얻고자 했습니다. 특히 외교, 교육 등의 분야에서 미국인 고문관과 군사교관을 초빙하려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보빙사의 구성원은 다양한 인물들로 이루어졌습니다. 전권대신 민영익(閔泳翊), 부대신 홍영식(洪英植), 종사관 서광범(徐光範)을 비롯해 수행원으로 유길준(兪吉濬), 고영철(高永喆), 변수(邊燧), 현흥택(玄興澤), 최경석(崔景錫)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또한 통역을 맡은 중국인 우리탕[吳禮堂]과 참찬관으로 미국인 로웰(Lowell, P.)이 동행했습니다.

 

사절단의 여정은 1883년 6월 11일(양력 7월 14일)에 시작되었습니다. 인천을 출발한 일행은 일본을 거쳐 8월 2일(양력 9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습니다. 미국에서의 40여 일간의 체류 기간 동안, 보빙사는 다양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8월 18일(양력 9월 18일), 뉴욕에서 미국 대통령 아서(Chester A. Arthur)를 접견하고 국서와 신임장을 제출했습니다. 이는 조선과 미국 간의 공식적인 외교 관계 수립을 상징하는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보스턴에서는 외국박람회, 시범농장, 방직공장, 공립학교 등을 방문했습니다. 이러한 시찰은 조선의 근대화에 필요한 다양한 분야의 발전상을 직접 목격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뉴욕에서는 병원, 전신회사, 보험회사, 신문사, 우체국, 육군사관학교 등을 둘러보았습니다. 이를 통해 사절단은 미국의 선진 의료 시스템, 통신 기술, 금융 제도, 언론, 우편 서비스, 군사 교육 등 다양한 분야의 발전상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워싱턴에서는 국무부, 농무부 등 중앙부처를 방문했습니다. 9월 12일(양력 10월 12일)에는 백악관을 찾아 미국 대통령에게 고별인사를 전했습니다. 이러한 일정을 통해 보빙사는 미국의 정부 구조와 운영 방식을 직접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공식 일정을 마친 후, 보빙사 일행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귀국했습니다. 홍영식 전권부대신은 로웰, 우리탕, 현흥택, 최경석, 고영철, 미야오카를 대동하고 태평양 항로로 귀국하여 1883년 11월 2일에 도착했습니다.

 

보빙사의 파견은 조선의 근대화와 국제 관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첫째, 조선이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둘째, 서구의 선진 문물과 제도를 직접 경험함으로써 조선의 근대화 정책에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했습니다.

 

특히 유길준과 같은 젊은 지식인들에게 미국 방문은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귀국 후 조선의 근대화와 개혁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유길준의 경우, 미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서유견문(西遊見聞)'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서구의 문물을 소개하고 조선의 근대화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보빙사의 파견은 또한 조선과 미국 간의 외교 관계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이는 후에 조선이 국제 사회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보빙사의 활동이 즉각적인 변화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조선 내부의 보수 세력과 청의 간섭, 그리고 복잡한 국제 정세 등으로 인해 근대화 정책의 실행에는 여러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빙사의 파견은 조선의 근대화와 국제화의 첫걸음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록 당장의 큰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했지만, 조선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넓히고 근대국가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과 경험을 축적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보빙사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국제 사회에서의 외교의 중요성,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개방적 자세, 그리고 국가 발전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의 필요성 등은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가치들입니다.

 

우리는 보빙사의 역사를 통해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성찰하며, 미래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용기와 도전 정신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국제적 도전들을 해결해 나가는 데 있어 중요한 교훈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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